[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김형백 카이시스 사장

[원문 인터뷰 보기]
* 이 인터뷰를 한 지가 벌서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요즘 여러 사업을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초심을 되새기고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보게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코너입니다. 엘오티베큠 오흥식 사장의 벤처창업기는 불가능할 것같은 일들을 해낸 벤처신화 성공담의 핵심엔진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오 사장이 바통을 넘긴 104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은 미 실리콘밸리에서 잘나가는 개발자로 활동하다, 귀국해 이제 막 벤처대열에 합류한 카이시스 김형백 사장입니다.


"아직 사업한지 얼마되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지만, 10년후 한국 IT산업을 이끌 차세대 리더중 한명입니다.경험과 IT산업을 보는 시각이 뛰어난 전문가입니다."

두 사람은 비즈니스관계로 미국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이후 친해져 이젠 형아우하며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합니다.

카이시스 김형백(34) 사장이 어떤 이유에서 10년후 한국을 이끌 차세대 IT 리더로 평가됐는지, 그의 사업과 비즈니스 철학에 대해 살펴보시죠.

실리콘밸리에서 10만달러가 넘는 고액 연봉을 받던 잘나가는 한국인 개발자가 테헤란밸리에 입성, 창업대열에 나선지 불과 1년만에 연매출 75억원대의 기술중심 벤처기업을 일궈내 주목받고 있다.

중대형 서버를 비롯, IT인프라에 들어가는 핵심 솔루션을 자체 개발한 기술중심의 회사인데다, 주로 해외에 수출하는 수출전문 벤처회사라 더욱 화제다.

주인공은 카이시스 김형백 사장. 테헤란밸리 사무실에서 만난 김형백 사장은 영락없는 에너지넘치는 세일즈엔지니어의 모습그대로다. 큰 덩치탓인지, 나이에 비해 훨씬 노련해보인다. 겸손함도 잃지 않는다.

고생은 전혀 모르고 살았을법한 수려한 외모에 빼어난 화술이 눈길을 끈다. 실리콘밸리에서 개발자로 일해온 경력탓인지, 기술과 시장트렌드에 강한 자신감을 보인다.

HW, SW 중심의 기업 IT인프라와 기술동향, 그리고 다국적 기업 제품과 트렌드를 설명하는 모습은 글로벌기업 세일즈마케팅 매니저의 모습과 영락없이 닮았다.

특히 중대형 서버를 둘러싼 기업 IT인프라 시장에 대한 설명은 '쾌도난마'란 말이 딱 어울릴만큼 아주 명쾌하다. 실리콘밸리에서의 풍부한 경험과 세일즈 노하우가 묻어난다.

카이시스는 올초 설립된 신생 벤처기업. 비즈니스모델은 컴퓨터부품과 휴대폰 유통, 실시간 웹분석을 하는 솔루션과 메일솔루션, 통합솔루션 등 IT인프라를 둘러싼 클러스터링 엔지니어링이 핵심 비즈니스다.

이를테면 기업들이 IT인프라를 구축하거나 해놓은 인프라를 가장 최적으로 사용할수 있도록 해주는 종합 솔루션을 개발, 판매하는 것과 무역업이다.

9월말께는 국내 유수 리눅스기반 솔루션업체를 제치고, 미 레반타사의 한국총판권을 획득,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한 솔루션 세일즈에도 나서고 있다. 올해 벌써 75억원의 매출이 확정적이고,내년에는 200억원의 매출을 낙관한다.대부분 중국 남미 등 해외수출이 대부분이다.

◆ 엄동설한에 핀 인동초

"여보,그냥 한국으로 돌아갑시다.생활비조차 없는 상황에서 공부를 더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여보."

98년 여름, 김형백은 한국으로 돌아가자며 아내를 설득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어렵사리 마련해 유학길에 들고온 800만원의 생활자금이 한달만에 바닥나자, 김형백은 앞날이 캄캄했다. 한 6개월은 버틸수 있을 거란 그의 순진한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내는 "계속 있자"며 완강히 버텼다. 며칠전 아내의 은반지를 잃어버린후 부둥켜안고 밤새 울었던 두 사람은 설움이 복받쳐 또다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김형백의 억척스런 생활력과 비즈니스에 대한 강한 집념은 어린시절의 불우한 환경덕분(?)이다. 그는 왠만한 고생이나 경제적 어려움에는 끄덕도 하지않는다.

어린 시절은 물론 결혼후에도 그의 생활은 늘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주에서 태어난 김형백은 초등학교시절, 부친의 사업실패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했던 가슴아픈 가족사를 간직하고 있다.

누나는 친척집에 맡겨졌고, 김형백은 6학년이던 83년, 어머니와 단둘이 상경,강남 개포동 허름한 단칸방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자식부양을 위해 보험설계사부터 정수기 판매등 안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고생하는 모친을 보며 자란 김형백은 늘 '성공'을 가슴속에 담고 살았다.



대학입학전까지 무려 18번이나 이사를 할만큼 그의 어린시절은 생활고와의 전쟁이었고, 이렇듯 고단한 유년시절은 김형백의 생활력을 더욱더 강인하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김형백의 꿈은 가족들이 같이 모여사는 것일만큼 간절했다.

김형백의 억척스러움은 대학진학후 모습을 드러낸다. 친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대학등록금을 마련했던 김형백은 입학후에는 모든 경제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

매일 강의가 끝나면 하루 3시간씩 짜장면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중국음식 배달을 택한 것은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시급을 많이 줬기 때문. 시간이 많은 주말에는 막노동판에 뛰어들었고, 방학이 되면 목돈을 벌기위해 우유공장 등에 취업했다.

그는 이미 대학 초년병시절부터 여느 친구들과는 달리 스스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할만큼 절박했다. 김형백은 군제대후인 97년, 대학 3학년 재학중인 신분으로 결혼한다. 결혼을 약속한 이상, 빨리 결혼하는게 기반을 잡는데 절대 유리할 것이란 나름의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예고없이 닥친 IMF 한파는 대학생 신혼부부에겐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차라리 어려울 때 아내와 같이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홀 몸도 아닌터라, 미국 유학은 간단한게 아니었다.

김형백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돈을 벌기'위해 책을 썼다. 96년 인터넷초창기시절, '인터넷 날개달기'란 책을 저술한데이어 윈도서버, 엑셀 활용기 등을 출간했다. 그는 대학 3년때부터 컴퓨터와의 깊은 인연을 맺는다.

빠듯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3학년초, 짜장면 배달해 받은 월급으로, 컴퓨터를 구입했던 것. 이때부터 그는 컴퓨터에 푹빠져들기 시작한다. 당시 PC와의 인연은 훗날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유학자금을 벌 요량으로 저술에 나선 그는 98년초, 몇권의 책을 출간하곤 거금 800만원을 손에 넣는다. 98년, 김형백은 부푼 꿈을 안고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아리조나주립대에 입학했다. 문제는 종잣돈 800만원을 단 한달만에 다 써버린 것.

"전 미국에서 꼭 차를 사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차없인 생활할수 없다는 걸 가서야 알았죠. 헌데 집얻고, 학비내고, 차값내고 나니, 정말 몇 달러밖에 남지 않더라구요."

앉아서 굶을 수는 없는 일. 그는 곧바로 아내와 함께 대형 은행빌딩 야간청소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달내내 청소일을 해 받은 월급은 704달러정도. 학비는커녕 생활비조차 모자랐다. 아내와 싸우기도 많이했고, 둘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많이했다.

"그땐 앞이 안보이더라구요.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했으니까요. 겁없이 시작한 미국생활이었죠. 정말 처절하게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학업도, 생활도 어느 것하나 해결되지 않는 그의 삶은 '가위눌린 악몽'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지옥같은 현실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김형백의 고민은 처절했다. 몇 주 고민하던 김형백은 한국인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이사가기로 작심한다.

99년, 합법적으로 일할수 있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둥지를 옮긴다.일단 확실하게 먹고살수 있는 터전부터 마련하자는 심산에서였다. 그와 아내는 서로 다른 한국식당에 취직했다. 근근히 생활을 이어갔다.

김형백,그는 누구인가.

72년 경남 진주産. 건국대 행정학과(92학번) 대학시절부터 컴퓨터 단행본 다수를 출간한 IT전문가. 96년부터 국내 최대 무료 엑셀커뮤니티사이트인 '김형백의 컴퓨터따라잡기 운영'사이트 운영. 실리콘밸리소재 아이텍에서 컨설턴트 및 강사. 실리콘밸리 소재 실리콜랙스사 개발자, 인터라지 프로젝트 매니저 역임. 2004년부터 인터라지 한국지사장 역임. IT인프라 구축에 대한 뛰어난 기획력과 컨설팅능력을 갖추고 있는 IT인프라 전문가.

▲취미 : 여행, 웹서핑 ▲운동 : 테니스 ▲존경하는 CEO : 알렌 킴 인터라지 사장. 오흥식 엘오티베큠 사장 ▲친한 IT맨 남환우 MS 아태총괄이사, 신용석 국가사이버안전센터 연구원, 케빈리 아이파크실리콘밸리 소장 ▲감명깊게 읽은책: 왜 벌써 절망합니까?(정문술 著) ▲10년후 모습 카이시스 본궤도 올려놓고 엔젤투자자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 새로운 변신, IT 강사

"강사님, 한번 지원해보시지요.선생님 적성에 딱맞는 잡(Job)인듯합니다."

자신보다 훨씬 연배인 나이 지긋한 수강생의 뜻밖의 제안에 김형백은 귀가 솔깃했다.

추천한 회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대형서버용 솔루션 전문개발회사였고, 김형백의 운명은 이때부터 급물살을 타게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IT개발자로 변신한다.

99년 샌프란시스코로 날라가 식당일을 하던 김형백. 99년 실리콘밸리에 불어닥친 벤처열풍은 김형백에게도 뜻하지 않는 행운을 안겨준다. 바로 교육기관 IT강사였다.

IT열풍이 일면서 당시 한인사회에는 교포들에 대한 IT 기술교육붐이 일었다. IT전문기술을 배우도록 해 교포들이 미 주류사회에 진입할수 있도록 하자는 것. 고액의 연봉을 주는 하이테크 기업에 취업시키자는 취지였다.

김형백은 아이텍이란 한국인대상 IT교육기관에서 강사로 나섰다. 그는 여기서 MCSE(Mocrosoft Certificated System Engineer) 과정 강의를 시작했다. 일종의 MS사에서 부여하는 자격증취득 과정이었다.

1년후인 2000년, 김형백은 또한번 변신을 한다. 실리콘랙스사에 입사, 솔루션개발자로 본격 나선다. 이때부터 그는 서버용 솔루션에 대해 폭넓은 전문성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2003년, 김형백은 자신의 강의를 수강하던 제자의 제안으로 인터라지사로 전격 자리를 옮긴다. 인터라지는 재미교포가 운영하는 회사로 전직장 실리콘랙스를 전격 인수한 상태였다. 한국형 솔루션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오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김형백은 여기서 중대형서버용 솔루션 개발관련, 프로젝트매니저역할을 하면서 처음으로 제품개발을 총괄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IT전문컨설턴트로써, 또 뛰어난 개발자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을수 있게해준 '일등공신'이 된다.

그는 글로벌 솔루션회사의 개발자로 일하면서도 중대형서버솔루션에 대한 책을 집필한다.

"서버의 경우 이것저것 테스트하는데만 1년이 걸립니다. 그만큼 서버급은 활용가이드책자를 낸다는 게 방대하죠. 하지만 그렇게 한번씩 정리를 함으로써 기술흐름과 정보트렌드에 대해 스스로 점검하고 한단계 업그레이드할수 있습니다. 이런 장점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계속해 출간을 했습니다."

이미 강사시절, 공부하고 정리하던 버릇은 개발자로 변신을 한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던 것. 그의 기술적 노하우와 개발자로서의 감각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미국 도착 4년만인 2003년말, 경제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인 2004년, 개발자로서의 탄탄대로를 뒤로하고 또다른 시도를 준비한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이때부터 다시한번 발휘되기 시작한다. 억대연봉제안을 뿌리치고, 한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로 한 것. 머나먼 이국땅에서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고액연봉이 보장된 개발자 자리는 쉽게 박차고 나가기 힘든 상황.

아내는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 이미 IT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산업의 트렌드를 읽고있던 그는 한국과 연계한 새로운 비즈니스의 가능성에 확신을 했다. 오랜 고민끝에 결론을 내린 그는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 33살 실리콘밸리 개발자의 새로운 도전

"한국에는 비즈니스의 근간(BI)이 되는 솔루션이 없습니다. 인적자원은 풍부한데, 단지 영어권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미국 IT산업 아웃소싱 주도권이 인도로 넘어가는 것뿐입니다. 한국서 충분히 만들수 있습니다."

인터라지 경영진을 설득시키며 김형백이 내세운 논리는 한국의 IT분야 R&D파워가 매우 파워풀해 마케팅, 영업능력이 있는 미국과 '윈윈전략'이 가능하다는 것.

2004년초 귀국한 김형백은 그해 5월 결국, 인터라지 한국지사를 설립한다. "한국의 개발능력은 결코 인도에 뒤떨어지지 않죠. 문제는 그런 리소스가 취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다국적기업 한국지사에게는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은행신용거래에도 제한이 있었고, 국내 유수 기업 및 기관과의 제휴비즈니스는 늘 '다국적기업 한국지사'라는 꼬리표 때문에 번번히 성사직전에서 물거품이 되기 일쑤였다.

고민끝에 본사에 SOS를 쳤다. 지사형태로는 힘든 상황을 설득시킨후, 한국에 벤처기업을 창업할 테니 자본금을 투자해달라고 요청한 것. 2005년 2월, 본사 투자를 받아 카이시스를 설립했다. 한국에서 창업을 한 것이다. 회사명은 넓은 세상이란 뜻의 카이와 시스템을 합친 카이시스로 정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사업수완. 그는 창업후 석달이 지난 5월부터 흑자를 달성하기 시작했다. 단기흑자를 위해 무역을 시작했다. 중국 심천소재 VGA카드공장을 통해 생산, 북남미시장 수출에 성공한 것.

1년도 채안되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이미 국내 PC주변기기 선두기업에 버금가는 제품소싱파워를 갖출만큼 급성장하고 있다. 3월 한달 10억원어치를 수출한 카이시스는 9월말까지 총 50억원의 수출고를 달성했다.

VGA카드 및 모뎀, 각종 PC주변기기 등 하드웨어를 특정국가별로 지속적으로 수출하고 있다. 김 사장은 어디에 어떤 고객이 있고, 어디서 저렴하게 소싱, 생산할수 있는 지를 글로벌하게 파악하고 있을만큼 무역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를 갖추고 있다.

무역업외에 웹메일과 그룹웨어기능을 묶은 리눅스기반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를 자체개발, 4월부터 중국수출을 시작했다. 물론 웹메일과 그룹웨어 등등 부문별 제품은 철저히 전문업체를 발굴, 아웃소싱을 통해 개발한다.

서버의 기종에 상관없이 자그마한 하드웨어형태의 셋탑박스를 서버에 꽂기만 하면 웹메일과 그룹웨어기능을 제공하는 이 제품은 5월 중국 정부로부터 '신기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미 7월부터 중국 시장에 판매중인 HP 서버에 이 제품을 장착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며, 내년초 HP서버를 통한 중국시장내 제품공급이 본격 진행될 전망이다. 이미 중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HP서버의 20%가 메일서버일만큼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다.

이와함께 랑차오(Lang Chao)란 중국내 최대 서버업체와도 패키지 채택을 위한 성능테스트를 8월말께 끝내고 세부 판매문제에 대해 협의중이다.

김 사장은 내년초부터 중국 현지 서버업체에 대해 연간 수만대분량 납품은 가능할 것이며, HP차이나와의 계약도 내년초 가시화할 것으로 조심스레 전망한다.

HP가 연간 2억대 규모인 중국 서버시장에서 차지하는 시장점유율이 20%대인 점을 감안해볼 때, HP 비즈니스의 잠재력은 가히 폭발적인 상황.

카이시스,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 : 2005년 2월 ▲직원수 : 12명 ▲사업영역 : IT컴포넌트 무역 유통 ,IT솔루션 개발 ▲경영계획 : 글로벌 IT솔루션 전문기업으로 부상 ▲매출목표 : 2005년 75억원, 2006년 200억원

◆ 김형백의 꿈, '클러스터링 솔루션을 아세요'

"기존 서버를 그대로 이용할수 있는 세계 최초 리눅스관리 어플라이언스 제품입니다."

김 사장은 요즘 만나는 고객마다 '레반타'란 제품을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다.

내용인즉, 가상의 OS를 만들어, 하드웨어가 죽더라도, OS는 살아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한 서버, OS분리형 솔루션. HW가 죽어도 OS는 서버상태를 계속 기록한다.

"지금은 HW위에 OS가 올라가다보니, HW가 하나만 죽어도 시스템전체가 다운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스토리지를 수직화한 개념의 SAN이란 네트워크개념이 등장한 것도 이때문이죠. 이젠 리눅스 OS를 분리, 운영할수 있습니다."

이 회사가 10월초, 미국 레반타(舊 리눅스케어)사의 한국총판권을 따낸 것도 이러한 높은 수준의 클러스터링솔루션 아키텍처 기술력때문이다.

김 사장의 요즘 꿈은 1미터짜리 미니 클러스터링시스템을 만드는 것.

"16개 컴퓨터를 1개의 파워로 쓸수도 있고, 병렬처리해 개별로도 사용할수 있습니다. 퍼포먼스와 안정성을 동시에 구현할수 있는 거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게 바로 서버의 크기란다.

"요즘 이슈는 IDC에 들어가는 유닛서버크기를 줄이는 문제입니다. 워낙 IDC운영료가 비싸기 때문이죠.크기를 너무 줄이면 발열이 문제고, 너무 크면 비용이 문제죠. 4유닛서버를 용량은 똑같게 하면서 2유닛서버로 개발한 서버를 야후가 채택한 게 대표적 사례입니다."

클러스터링솔루션은 HW,SW 모두를 해결하는 종합예술이라는게 그의 해석.

"궁극적으론 HW통합된 솔루션을 개발하는게 꿈입입니다. 아마 내년중엔 카이시스에서 나올겁니다."

김 사장은 창업한지 불과 1년도 채안되는 신출내기 CEO지만,폭발적인 실적을 만들어내며, 벌써부터 스타급 '신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IT산업에 대한 전문성과 HW, SW분야를 넘나드는 해박한 비즈니스적 감각, 트렌드를 읽는 식견이 만들어낸 결과다.

첫해인 올해 75억원규모의 매출은 거의 확정적이다. 내년에는 200억원의 매출은 낙관한다. 현재 진행중인 계약건과 내년에 내놓을 신제품을 감안해볼 때 매출은 더 늘어날 것이라는게 그의 설명. 200억원은 매우 보수적으로 잡은 매출이란다.

◆ 김형백의 트렌드 읽기

김 사장은 IT 트렌드를 읽는 남다른 식견을 자랑한다. 실제 그는 MS건, HP건, 서버 신제품을 내놓으면, 1년간 이를 리뷰한후 책으로 출간한다.

특정 글로벌기업의 서버환경이 중앙집중식으로 갈건지, 분산형으로 갈건지를 이를통해 정확하게 파악한다. 이러한 조짐과 징후를 종합, 앞으로 서버환경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어떤 서버가 나올 것인지도 감각적으로 분석해낸다.

창업할당시 전혀 주저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시장을 읽어내는 나름의 강점때문이었다. 10만달러가 넘는 거액의 연봉을 제시한 쥬니퍼네트웍스 개발자 오퍼자리를 마다한 것 역시, 정해진 틀에서 정해진 것만 개발하는 개발자의 역할보다는 비즈니스 트렌드를 읽어낼수 있는 세일즈엔지니어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일즈엔니지어는 창업할 경우, 성공확률이 매우 높습니다.개발자로 계속 있었다면 절대 엔지니어를 이길수 없었을 겁니다."

그가 세일즈 엔지니어로서의 길을 택한 것은 창업을 위해서였다. 창업스토리는 짧지만,그는 벤처성공론에 대해 나름의 소신을 갖고있다. 김형백 성공론의 첫번째는 그 분야를 잘알아야한다는 '고수론'. 안다는 것은 기술적 전문성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제품이 안좋으면 안팔리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무조건 팔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기술과 시장, 그리고 고객의 니즈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한다고 설명한다.

"IT솔루션이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특히 혼자 너무 앞서가면 망하죠. 파괴적 창조를 하되, 시장흐름을 탈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그룹웨어를 포함, ERP 등 토종 솔루션산업이 지리멸렬하고 있는 것은 기술의 차이가 아니라, '축적의 차이'라고 지적한다. "국내 ERP, 그룹웨어 등 제품이 SAP 에 경쟁이 안되는 것은 비즈니스노하우의 흐름을 축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기술이 떨어지는게 아닙니다."

비즈니스노하우의 변화와 흐름에 대한 축적이 없기 때문에, ERP를 채택한 기업의 경우 관리자와 직원이 모두 ERP때문에 오히려 불편해하는 웃지못하는 상황이 펼쳐진다는 것. 모두 ERP에 얽매여 중복적으로 일을 하는 비효율적인 상황이 벌어진다는게 그의 진단.

성공을 위한 두번째 조건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도전론'. 아무리 앞이 안보이고, 캄캄해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야 한다는 것. 그는 당장 내일 한끼 식사를 걱정하며 처절하게 살았던 미국유학 초기시절의 어려움이 사회생활을 하는게 큰 힘이 된다고 술회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잘나가는 개발자자리를 박차고 고국 테헤란밸리로 날라든 김형백 사장은 이미 글로벌비즈니스를 펼쳐나가는 미완의 대기였다.그가 '클러스터링솔루션'이란 새로운 영역을 어떻게 개척해낼지,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형백 사장은 전 미래산업 창업자인 정문술 회장이 저술한 '왜 벌써 정말합니까?' 란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생활에 적응하고,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창업, 기반을 다질수 있었던 것도, 절박한 상황을 극복했던 정 사장의 가슴저민 창업이야기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네요.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